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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 행/명승및 유적지

진주성 탐방(2020.11.20)-1

by 하담1 2020. 11. 25.

진주성 탐방(2020.11.20)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과 의기 논개를 떠올리게 됩니다. 진주성은 호국충절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진주대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왜군 3만여 명이 침공해 올 때 진주 목사 김시민은 3,800여명의 군사와 성민의 힘을 합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청사에 우뚝한 진주대첩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 크게 패한 왜군이 설욕을 노려 9만여 명으로 재침하자 성안의 민군관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했습니다.

 

진주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기 논개입니다. 논개는 왜의 재침으로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해 강물에 몸을 던져 충절을 다했습니다.

 

 

2020년 11월 20일, 남파랑길 트레킹을 가는 길에 들렸습니다.

 

촉성루가 있는 진주성....논개가 왜장을 부여잡고 강물에 몸은 던져 충절을 다했다는 곳이 있는 진주성입니다. 언젠가 한번 가봐야 할 곳인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여지껏 가보지 못한 명소중의 하나입니다.

 

그동안 많은 여행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꼭 가봐야 할 곳 중에 미쳐 가보지 않은 곳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남파랑길을 걷기위해 내려갈 때 남쪽에 있는 명소들을 들렸다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걸어야 할 남파랑길 코스가 진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조금 일찍 내려가 진주성을 들려 갔습니다. 진주성을 한바퀴 돌아보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남짓이면 충분히 들러볼 수 있습니다.

 

입구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진주성의 안내도를 받아 유적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확인하고 안내글을 읽고 천천히 산책 삼아 탐방을 하니 아주 유익한 시간이 됩니다. 

 

왜 진작에 오지 않았나....

 

유적을 둘러보고 사진 찍고...논개가 왜장을 부여잡고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는 의암도 찾아가 당시를 머리속에 그려보고....촉성루를 올려다 봅니다. 

 

북장대는 현재 완전히 해체를 하여 복원 공사를 하고 있는 상태라 볼 수 없었지만 그 이외의 건축물들은 모두 찾아 보았습니다. 사진도 찍고....

 

진주성을 한바퀴 돌아보고 남파랑길 트레킹 베이스 캠프로 정한 광암해수욕장으로 갑니다.   

 

공북문은 17세기 이후에 그려진 진주성도에 북쪽으로 나 있는 문입니다. 곡북문의 공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뜻이고, 북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입니다.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 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입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시만 장군전공비와 촉석정충단비

 

김시민 장군은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끈 주인공으로 이러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것이 바로 김시민 장군 전공비입니다.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을 무찌른 공으로 2등 공신 김시민 장군에게 선무공신교서를 내렸습니다. 보물 제 1476호로 지정된 김시민선무공신교서는 국립 진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촉석정충단비는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3년)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조선 숙종 12년(1686년)입니다.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해 기술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임란 당시 부친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한 고종후,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한 김천일, 최경희의 행적이 기록돼 있으며, 황진, 장윤 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이 기록돼 있습니다. 

 

호국종각은 진주성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문화재 육성 기금으로 1980년 제작한 범종입니다. 종신에는 각종 문양이 부조되어 있고 이은상 시조 시인의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종신은 2.7m, 지름은 1.7m이며 매년 연말에 제야의 종 타종 행사를 호국의 종각에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촉석루.

진주성의 남쪽 벼랑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임을 자랑합니다. 고려 고종 28년(1241)에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후 몇 차례 불타 없어졌고, 여러 차례 고쳐지었습니다.

 

하륜의 촉석루기에 따르면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바위위에 지은 까닭'에 누의 이름이 촉석이라 했다고 전해집니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로서 장원루라고도 부릅니다.

 

촉석루는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보 제276호였습니다.

 

전쟁후 불탄 것을 진주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 옛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고 2020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되었습니다.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말합니다. 조선 선조 26년(1593년)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의 민군관이 모두 순절 할 때 논개도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습니다.

 

이에 논개의 의열을 지키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 즉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인조 7년(1629년) 진주의 선비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고 글자를 새겼습니다. 

 

함옥헌

촉석루는 단독건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4개의 누각이 있었던 웅장한 건물이었습니다.  누각의 명칭은 쌍청당, 임경헌, 능허당, 청심헌입니다.

 

쌍청당은 1481년 이전에 세워졌고 동각인 능허당은 149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서각인 임경헌은 1523년 무렵 세워졌으며 능허당은 동쪽 청심헌은 1481년과 1530년 사이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후 능허당은 함옥헌으로, 임경헌은 관수헌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촉석루 부속건물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겪으면서 불타 없어졌습니다. 1618년 우병사 남이흥이 함옥헌을 중건하였고 병사 이수일이 세웠던 청심헌은 1623년 화재로 불타버렸습니다.

 

함옥헌 또한 1906년경 소실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함옥헌은 촉석루와 연결되어 있었고 사신이나 손님들이 방문하였을 때 쉬며 잠자는 곳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의기사.

의기사는 조선 선조 26년(1593)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효종 2년(2651) 양곡오두인은 의암기를 지어 촉석루에 현판하였으며, 경종 2년(1722)에는 명암 정식이 지은 비문으로 '의암사적비'를 세웠습니다. 영조 16년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의기사를 창건하고 '의암사적비'의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우고 '의기논개 지문'을 내걸었습니다.

 

 

일병 제씨쌍층비라고도 부르는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크게 전공을 세운 성주목사 제말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도와 큰 공을 세운 제홍록 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습니다.

 

제말 장군은 의병을 모아 웅천, 김해, 의령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말 장군의 조카인 제홍록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습니다. 이에 정조 임금이 이들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조판서 서유린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고 쌍충각이라 이름하여 진주성과 성주성에 각각 세우게 했습니다.

 

본래 이 비는 진수성 안에 있었은데 일제 강점기에 관헌들에 의해 방치되었다가 196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비각을 새로 지었습니다.